고 임응식선생 추모전사진전 2011년 12월 21일 ~ 02월 12일
전시장소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주소 서울 시청건너편 덕수궁내
전시 시간 09:00---17:00
국립현대미술관 『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전 개최
- 한국사진의 근대화를 이룬 사진작가 임응식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펼쳐지는 한국 근 현대사의 생생한 기록
- 200여점의 작품을 통한 작가의 작업세계 조명
- 지난 50년동안 변화하는 명동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명동 사진’ 최초공개
국립현대미술관은 12월 21일부터 2월 12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사진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진 계몽운동가 및 교육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사진의 근대화를 이룬 인물인 임응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다. 전시출품작품은 200여점으로 미술관소장품 160점과 유족이 소장한 미공개 필름을 새롭게 인화한 작품 40점들로 구성된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고 할 수 있다. 임응식은 1957년에 뉴욕 근대미술관(MoMA)의 사진 전시인 <인간가족전>을 국내에 유치했는데, 당시 경복궁에 있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대단한 호응을 얻으며 사진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또한 국립대미술관의 첫 사진전시가 바로 1982년에 개최된 임응식의 초대전이었으며, 이 전시를 기회로 그는 작품 420여 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 사진은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한 예술사진, 즉 회화적인 분위기를 띠는 아름다운 사진이 주를 이루었다. 임응식은 6.25 전쟁의 종군사진가로 참여하면서 사진의 사실적 기록성에 눈을 떴고, 그 이후로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인 '생활주의 사진'을 주창하게 된다. 그가 주창한 '생활주의 사진'은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사회현실과 인간의 생활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젊은 사진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50-60년대 한국사단에서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전시는 임응식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1930-40년대 '예술사진' 시대의 작품부터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1950년대의 소위 '생활주의 사진',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이후로 작가가 일정한 주제를 내걸고 촬영하여 『공간』지에 연재한 '한국의 고건축'과 '한국의 예술인'시리즈를 시대순으로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그 동안 거의 발표되지 않은 작업인, '명동 사진'이 출품되는데, 유족이 소유한 필름을 인화하여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작가가 명동 거리를 다니면서 명동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스냅 사진으로 찍은 것들로,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변화하는 명동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작가와 함께 활동한 동료, 제자들이 촬영한 <기억의 헌사: 임응식의 초상사진>과 초기 부산에서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작은 역사전: 임응식과 초기 부산사진>도 전시에 포함되어 작가의 삶을 보다 입체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연계 행사로는 2012년 1월에 한미사진미술관, 부산 고은사진미술관과 연합으로 개최하는 학술 세미나가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를 재조명하는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 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전시를 통해 한국사진사의 흐름을 조명해보고, 각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상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oca.go.kr)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 전시개요
○ 전 시 명: 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
○ 주 최: 국립현대미술관, 한겨레 신문사
○ 기 획: 이경민 (사진아카이브 연구소 대표), 국립현대미술관 공동기획
○ 전시기간: 2011년 12월 21일(수) 2012년 2월 12일
(개막식: 2011년 12월 20일(화) 16:00 예정)
○ 전시장소: 덕수궁 미술관
○ 작 품 수: 사진 및 자료 200여 점
○ 관 람 료: 일반 5,000원)/ 청소년 2000원 (덕수궁입장료 포함)
□ 다운로드 (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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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 전시 개최
※첨부 1. 전시소개 및 작품세계
2. 작가의 삶
1. 전시소개 및 작품설명
임응식은 생전에 ‘한국 사단(寫團)의 개척자’, ‘한국 1세대 사진가’, ‘사진예술의 선각자’,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 ‘사진계의 살아있는 역사’, ‘한국 현대사진의 선구자’, ‘한국 사진예술의 태두’, ‘한국사진의 대부’ 등 다양한 헌사를 받아왔다. 실제로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진가로서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진단체를 결성하여 사단(寫壇) 형성에 힘써 온 행정가이자 교육자, 평론가로 활동해오면서 우리나라 사진제도의 기틀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국사진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활동해온 사진가였다. 이런 점에서 본 전시는 임응식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한국사진사의 흐름을 조명해보고, 각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상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사진을 기록물의 차원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그의 작품과 삶을 한국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재정립해 보기를 희망한다.
이 전시는 크게 4개의 부문으로 구성된다.
제1부 '예술사진에서 사진예술로'
임응식의 초기 작품부터 1960년대까지의 예술사진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조선향토색이 강조된 예술사진과 모더니즘 계열의 포토그램, 1945년 해방직후 실험적으로 제작한 림스그램(Limsgram)과 부산시절 촬영한 일상의 기록사진, 그리고 한국전쟁에 종군해서 촬영한 보도사진과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중심으로 주창해온 '생활주의 사진', 마지막으로 50~60년대 제작된 복고적인 예술사진과 조형적이고 추상적인 사진 등이 포함되었다. 이 사진들은 우리나라 예술사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일제강점기에 수용·정착되고 제도화되었던 예술사진으로부터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의 예술사진과 기록사진 그리고 전후(戰後) 전개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계열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진 활동은 한국사진사의 전개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제2부 '문화재와 예술가의 기록'
임응식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작업한 고건축 사진과 예술가들의 초상사진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업들은 한 건축 잡지와의 만남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는데, 특히 문화재 사진은 1966년 11월 『공간』을 창간한 건축가 김수근의 의뢰로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의 자랑거리이자 문화유산이지만 대중들의 이해와 관심이 부족했던 전통건축을 잡지를 통해 알려야겠다는 신념 하에, 당시 한국 사진계의 대표 사진가로 알려졌던 임응식에게 고건축 촬영을 부탁했다. 비록 임응식은 건축에 문외한이었고 건축사진도 낯선 장르였지만 수시로 도서관에 드나들며 자료조사와 공부를 하면서 예비지식을 쌓았으며, 그에게 쏟아진 건축계의 불신을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극복해나갔다. 임응식은 1966년 11월호부터 1969년 5월호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한국의 전통건축'사진을 연재했는데, 종묘를 필두로 낙선재, 부석사, 해인사, 이조 상류주택, 경복궁, 칠궁, 비원, 금산사, 통도사, 실상사, 쌍계사, 선암사, 범어사 등을 차례로 지상 발표하였다.
예술가의 초상은 임응식이 <공간>의 주간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연재되었고, 연재가 끝난 이후에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속되었다. 초상의 주인공들은 건축가, 서양화가, 서예가, 동양화가, 배우, 작곡가 등 예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사진 속에서 자신의 직업을 대표할 수 있는 포즈를 연출하고 있다.
제3부 '명동, 명동사람들'
임응식이 명동을 주제로 찍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서울 수복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종군사진기자로 투입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1950년의 명동을 촬영한 이래로 그가 사망하던 해인 2001년까지 시종일관 명동 거리로 출사를 나갔다고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문화예술의 공간에서 상업공간으로 변화해 온 명동은 화려하고 번화한 곳으로, 현대화 되어가는 대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명동을 주제로 찍기 시작한 것은 50년 9/28 수복 때 인천 상륙작전에 사진반원으로 종군하여 폐허가 되어 버린 명동의 모습을 비통한 감정으로 찍었던 그때부터이다. 환도 후 줄곧 30년을 두고 이틀이 멀다하고 시시각각 변모하는 그 모습을 사진에 기록해 왔다…… 나의 생활 속에서 명동을 떼어놓을 수 없다. 찍고, 찍고 또 찍어도 한없이 찍고 싶다. 명동의 망령이라도 붙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다.” (임응식, 「나의 명동」, 『신동아』 (동아일보사, 1980년 5월호), p. 93)
“돌아가시기 얼마 전 따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평소에 다녔던 커피숍 등 명동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차 밖으로는 못나가고 차 안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찍었다는군요. 평생을 주제로 한 명동의 마지막 촬영이었죠. 죽는 순간까지 명동을 카메라로 담은 셈입니다.” (황규태, 「7인의 사진가, 임응식을 말한다」, 『아트 인 컬처』 (미술사랑, 2001년 3월호), p. 77
명동사진은 그동안 임응식의 사진집이나 개인전을 통해 일부 소개되기는 했으나,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들이 많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족으로부터 건네받은 110롤의 필름에서 1차로 273컷을 선별하고 이 중에서 다시 123컷을 선별하여 주제별로 재구성하였다.
<명동풍경>
폭격을 받아 폐허로 변한 명동의 거리풍경을 비롯하여 1950년대 명동의 일상 모습을 담은 사진들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혼마치(本町)라 불리는 충무로와 함께 일본인에 의해 일찍이 상권이 형성되었던 명동은 금융기관과 관공서뿐만 아니라, 백화점과 극장, 요릿집과 카페, 다방 등이 즐비했던 유흥과 소비의 중심이었다. 해방 후에도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은 한국전쟁 중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1952년 정부의 전재복구재건 계획에 따라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되어 빠르게 복구되기 시작한 명동은 점차 제모습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피난 갔던 사람들도 명동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임응식의 사진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파괴된 명동이 복구되는 과정과 그곳에 몰려든 다양한 인간군상을 발견할 수 있다.
<명동의 인물>
환도 후 서울이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명동에는 문인과 화가, 음악가, 연극인, 영화인 그리고 사진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다방과 술집, 카페와 음악다방을 중심으로 수많은 문학작품과 예술가와 관련된 숱한 일화들이 태어났다.
<명동의 패션>
임응식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테마 중의 하나로 주로 젊은 여성들의 의상에 초점을 맞춘 사진들이다. 그는 롱스커트에서 미니스커트, 나팔바지(판탈롱), 맥시스커트, 미디스커트, 통바지, 샤넬스커트, 일자바지, 플레어바지, 그리고 일명 땅꼬바지 등으로 변해온 여성의 치마와 바지의 모습을 기록했는데, '사진으로 보는 한국 여성 패션사'라고 볼 수 있다.
<L씨의 명동 일일>
박태원의 소설 『구보 씨의 일일』을 모티브로 하여 임응식이 주로 다녔던 명동 코스를 지도와 사진으로 재구성했다. 임응식은 미도파백화점을 기점으로 하여 롯데호텔- 을지로-중앙극장-명동성당-동해루반점-태극당-충무로거리-중앙우체국-신세계백화점을 코스로 하여 명동의 모습을 기록했다.
제4부 '임응식과 사진아카이브'
제4부는 2개의 소품전과 임응식이 남긴 유품과 그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로 구성된다.
첫번째 소품전인 《작은 역사전: 임응식과 초기 부산사진》은 임응식과 함께 부산광화회(1946년 창립)와 부산예술사진연구회(1947년 창립)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진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부산시절 임응식의 사진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그가 이끌었던 사진단체의 성격과 활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기획되었다.
두 번째 소품전인 《기억의 헌사》는 임응식과 함께 활동했던 동료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후배나 제자들이 받치는 헌정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1952년 결성된 한국사진작가협회(이하 사협)의 창립회원이며 임응식의 오랜 동료이자 조력자였던 김한용을 비롯하여, 신선회의 창립회원이자 사협 회원으로서 임응식의 '생활주의 사진'을 한 단계 끌어올렸던 고(故) 한영수, 백영사우회 회원으로서 임응식의 지도를 받았던 홍순태와 한정식, 현대사진연구회 회원이었으며 1983년 미국 LA 한국공보관에서 《임응식 초대전》을 기획했던 황규태, 1972년 임응식이 제4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할 때 이 행사의 주무부처인 문화공보부의 장관이었던 사진가 윤주영, 신문사와 잡지사의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임응식을 취재했거나 친분을 쌓았던 고(故) 김기찬과 왕영상와 전민조,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졸업생으로 그에게 지도를 받았던 김녕만, 박상훈, 권태균, 김영일 등 모두 13명의 사진가가 촬영한 임응식의 초상사진 및 기념사진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 부문에는 소품전 외에 임응식이 활동하면서 남긴 기념사진과 서적, 스크랩북과 유묵, 그리고 생전에 사용하던 카메라와 확대기 등이 아카이브 형태로 전시되며, 이를 통해 그의 삶과 작품 활동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2. 작가의 삶
1912년에 부산에서 태어난 임응식은 비교적 유복하고 개화된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림과 바이올린에 열중하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운 그는 일본 와세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형에게 카메라를 선물로 받은 것을 계기로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사진 단체인 부산여광구락부(釜山黎光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그의 작품(<초자의 정물>)이 일본의 월간잡지인 『사진살롱』에 입선되기도 했다.
1934년에 일본 도시마 체신학교를 졸업한 임응식은 이듬 해에 강릉 우편국 직원으로 취직하여 3년간 강원도에 거주하면서 '강릉사우회'라는 사진가 단체를 이끌었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에서 주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사진 현상소를 차렸는데, 이 사업은 크게 번창하여 훗날 그가 사진운동을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46년에는 부산지역의 사진단체인 '부산광화회'를 결성했으며, 이 단체에서는 'ARS 사진 뉴우스'라는 사진잡지를 주간으로 발행했다. 부산의 사진 인구가 점점 많아지면서 부산광화회는 19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부산사연)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응식은 평소 친분이 있던 부산미국문화원 원장 유진 크네즈의 제안으로 종군사진가로 발탁되었다. 줄곧 부산에 살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하지 못했던 그는 당시 『라이프』 지 사진기자(Hank Walker)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동행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폭격으로 부서진 서울은 그야말로 유령의 도시였다......그 속에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너무 끔찍하고 소름이 끼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고사하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입성한 후 사흘간은 사진을 한 장도 찍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대상만을 아름답게 찍어대던 나의 카메라 버릇을 사흘 동안 극복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나는 점점 예술사진가에서 기록사진가로 변해갔다.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서 남기는 중차대한 임무가 주어졌다는 지각을 비로서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中)
전쟁을 계기로 사진의 사실적 기록성에 눈을 뜬 그는 그 이후로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인 소위 “생활주의 사진”을 주창하게 된다. 그가 주장한 “생활주의 사진”은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사회현실과 인간의 생활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젊은 작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1950-60년대 한국 사단에서 주류로 자리잡았다.
임응식은 1952년에 '한국사진가협회'이라는 최초의 전국사진인단체를 창립했는데, 여기서는 창립기념전에 출품된 회원들의 작품 50여 점을 전부 <제1회도쿄국제사진살롱>에 출품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임응식의 <병아리>가 입상을 했으며, 그는 그 이후로도 각종 국제 살롱에 적극적으로 출품하여 한국사진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특히 1957년에는 미국 대사관과 뉴욕 근대미술관에 직접 접촉하여 <인간가족전(The Family of Man> (1955년에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전시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여정을 503점의 사진 작품으로 구성한 전시. 세계 44개국, 85개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함)을 경복궁미술관에 유치했다. 25일 동안 열린 이 전시에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3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이는 사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사진의 예술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사진부문을 포함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964년 제13회 국전에 사진부가 신설되기도 했다. 사진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그는,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사진강좌를 맡은 이래 1978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기까지 한국의 사진 교육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